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록히드 사건 (문단 편집) === 검찰 수사 === 당시 다나카 후임 총리 [[미키 다케오]]는 "청렴한 미키"로 자신의 이미지를 내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중의원 예산위원회의 조사 생중계를 지켜본 일본 국민들은 사건을 철저히 수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미키는 검찰과 관련기관에 수사를 지시했다. 게다가 록히드와도 관련이 있기 때문에 당시 미국 대통령 [[제럴드 포드]]에게도 이례적으로 협조 요청을 구하는 등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다나카 가쿠에이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자유민주당(일본)|자민당]] 내 자신의 파벌들을 적극 동원하기 시작했다. 소위 친다나카 성향의 의원들은 록히드 사건 수사가 정권의 표적수사라고 주장하며 미키 다케오를 끌어내릴 궁리를 시작했다. 미키 타케오는 자민당에서는 소수파였기에 위치가 꽤 불리했다. 자민당내 대표적 반미키 성향을 지닌 [[시이나 에쓰사부로]]는 사건수사를 서두르는 미키를 '''"너무 까분다"'''며 비판했고 다나카와 결탁해 1976년 5월 7일 회동을 가진 끝에 미키를 총리 자리에서 해임시키기로 합의했다. 여기에 [[오히라 마사요시|오히라]]계, [[후쿠다 다케오|후쿠다]]계, 시이나계, 미즈타계, 후나다계 등 대부분의 계파들이 여기에 찬동했다.(미키 내림) 유일하게 [[나카소네 야스히로|나카소네]]계만 미키 총리 쪽에 붙어 있는 상황이었다[* [[요시다 시게루]]-[[사토 에이사쿠]]-다나카 가쿠에이의 전횡에 질려 버린 당시 자민당 중진들이 당개혁의 일환으로서 총리-총재파벌에서 당 간사장을 내는 관례를 포기하고 적당한 중간파벌에서 간사장을 내기로 합의하면서 미키 정권의 자민당 간사장으로 취임한 사람이 나카소네였다. 게다가 '''미키와 나카소네는 1950년대말까지 [[보수본류|보수 주류파]]가 아닌 [[보수방류|보수 방계의 정당]]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서로 잘 이해하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런 연고가 있었기 때문에 나카소네는 미키 내각 퇴진운동을 적극 저지하고 나섰다.]. 일본 국민들은 이를 록히드 사건을 은폐하려는 시도라고 분개했으나 다나카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에게 찬동하는 계파들과의 결속을 강화시켜 나갔다. 이런 가운데 요시나가 유스케를 수사주임으로 하는 도쿄지검 특수부는 이례적으로 7월 26일 다나카를 체포했다. 이를 나카소네계의 법무장관 아나바 오사무의 역지휘권 발동[* 쉽게 말해서 정치적 목적으로 다나카를 체포했다는 이야기다.]으로 간주한 다나카계는 맹공을 퍼부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